독립운동가를 ‘이승만 情婦’로 몬 ‘백년전쟁’ 영상… 건국 훈장 추서에도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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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전문기자의 Special Report]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노디 지사 인격 살인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10.28 03:00
지난달 22일 하와이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김노디, 안정송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문대통령 왼쪽은 김노디 지사 딸인 위니프레드 리 남바씨/뉴시스
지난달 22일 하와이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김노디, 안정송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문대통령 왼쪽은 김노디 지사 딸인 위니프레드 리 남바씨/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하와이 방문 때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식을 거행했다. 대통령이 해외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직접 훈장을 준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건국훈장을 받은 두 명 중 ‘김노디’라는 이름이 있었다.
‘3⋅1 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대한부인구제회 임원으로 여성의 권리를 높이는 교육에도 힘쓰셨다.’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김노디(1898~1972) 지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이승만 情婦'처럼 다룬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을 '플레이보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시 20대였던 김노디 지사와 불륜관계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승만 뒷편에 서양 여성들과 함께 김노디 지사 얼굴이 보이게 편집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을 '플레이보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시 20대였던 김노디 지사와 불륜관계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승만 뒷편에 서양 여성들과 함께 김노디 지사 얼굴이 보이게 편집했다.
김노디 지사는 대선이 한창이던 2012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유튜브 동영상에 등장한 적 있다.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반역자’로 비난한 ‘백년전쟁’에서다. 300만 넘게 봤다는 이 영상에서 김노디는 ‘이승만과 놀아난 철부지 여성’처럼 나온다. ‘나이 마흔여섯에 자신을 숭배하는 스물두 살 여대생과 여행도 하고’라는 해설과 함께 ‘오벌린대 여대생 노디 김’ 자막과 얼굴 사진이 등장했다. 이 영상은 1920년 6월 두 사람이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하는 맨(Mann) 법 위반으로 체포⋅기소됐다’고 소개했다.
미국 경찰에 체포될 때 찍은 것 같은 사진(일명 ‘머그 샷’)도 여러 차례 내보냈다. ‘이승만은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며 잡지 ‘플레이보이’ 표지를 배경으로 김노디 여사 얼굴까지 등장시켰다. ‘백년전쟁’대로라면, 김노디는 ‘플레이보이’ 이승만의 정부(情婦)였다.
◇'옷깃을 적시게 할 만큼 비감한 연설’
김노디의 1919년 필라델피아 연설은 미주 교포신문인 ‘신한민보’가 ‘비감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눈물을 옷깃에 적시었다더라’ (1919년 5월 6일 자)고 보도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신한민보는 이후 김노디의 활약을 잇따라 전했다. 김노디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5월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국친우회’ 대회에서도 첫 연사로 나섰다. 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서재필·이승만이 주도해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구미에서 결성된 친한단체다. 한국 독립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는 걸 목표로 한 이 단체를 확산시키기 위해 김노디는 미국 순회 연설을 다녔다. 신한민보는 ‘김노디 여사의 애국적 활동’(1920년 6월 4일)기사에서 그해 5월 30일에도 오하이오주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연설이 예정돼 있다고 소개했다.
◇'백년전쟁’의 ‘맨법 위반’ 공격
'백년전쟁'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부적절한 관계'로 미국 경찰에 체포돼 '머그샷'을 찍은 것처럼 화면을 합성해 내보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부적절한 관계'로 미국 경찰에 체포돼 '머그샷'을 찍은 것처럼 화면을 합성해 내보냈다.
‘백년전쟁’이 문제 삼은 것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1920년 6월 16일 시카고~샌프란시스코 간 기차를 함께 탄 여행이다. 이승만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위해 하와이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승만은 도중에 클리블랜드, 새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 등에 들러 모임을 갖고 미국인과 한인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김노디는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석한 뒤 오하이오주 오벌린대로 돌아갔다가 하와이의 어머니를 만나러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덕희(80)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은 ‘백년전쟁’의 허구를 밝히기 위해 김노디 여사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가 2015년 낸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에 따르면, 김노디에겐 미행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6월 22일 시카고 이민국에 이승만과 김노디가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맨 법’을 어기고 있다고 신고했다. 호놀룰루 이민국 조사관은 그해 8월 27일 김노디를 면담 조사하고, 이승만과 김노디의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신빙성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김노디가 어머니를 만난 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 있는 도항증도 발급해줬다. 이승만과 김노디는 검찰에 기소된 적도 없다.
◇김노디와 이승만
김노디는 호놀룰루 이민국 조사에서 이승만에 대해 ‘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항상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늘 그분을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다’고 답했다. 1905년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한 김노디는 오하이오주 우스터 고교와 오벌린 대학에 진학할 때, ‘한인 중앙학교’ 교장이던 이승만의 도움을 받았다. 이승만은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소개장과 장학금을 받도록 편지를 보내 도와줬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에 돌아온 김노디는 1922년부터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에 힘썼고, 광복 후인 1953년 귀국해 외자구매처장(조달청 전신)으로 일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39년10월25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독립운동단체 고문단과 함께 촬영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모자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이승만연구원
이승만 대통령이 1939년10월25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독립운동단체 고문단과 함께 촬영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모자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이승만연구원
1939년11월 워싱턴 D.C를 향해 하와이를 떠나는 이승만 박사 부부. 왼쪽 모자 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김노디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력자였다. /이덕희씨 제공
1939년11월 워싱턴 D.C를 향해 하와이를 떠나는 이승만 박사 부부. 왼쪽 모자 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김노디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력자였다. /이덕희씨 제공
◇‘민족문제연구소’의 침묵
이승만을 ‘반역자’ ‘플레이보이’로 매도한 동영상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달 김노디 지사 서훈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사과나 해명 하나 내놓지 않았다. 이 연구소를 이끄는 임헌영 소장은 2019년 ‘민중의 소리’ 인터뷰에서 현 정부의 대북(對北) 정책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근대사 이후의 흐름을 바꿨다”, “동학혁명도 3⋅1운동도, 4⋅19혁명도 못 바꾼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할 만큼 현 정부와 가까운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가 김노디 지사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면, 사과나 해명을 하든지, 아니면 반발이라도 해야 할 텐데, 침묵을 고수한다. 유튜브에선 지금도 ‘눈물이 난다’ ‘진실을 알려주는 다큐를 만들어줘 고맙다’는 댓글이 달려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년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2019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백년전쟁’은 주류적·역사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양한 여론의 장(場)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며 “방송 내용이 (객관적) 사료에 기초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백년전쟁’을 내보낸 ‘시민방송’을 중징계한 결정이 위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관 13명 중 7대6 차이였다. ‘백년전쟁’이 문제없다고 판단한 대법관 7명 중 6명은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됐다. 작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이 대법원과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정부가 김노디 지사를 뒤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백년전쟁’이 모욕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명예에 대해 아무런 해명이나 사과 없이 훈장 하나 챙겨주면 그만일까. 민족문제연구소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와 이메일로 문의했으나 연구소측은 “답변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서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백년전쟁’이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인격 살인에 가까운 공격을 한 데 대해 반성하고 영상을 내려야 한다”면서 “’백년전쟁’ 인터뷰에 응해 권위를 더해준 역사학계 인사들도 사과나 해명을 내놓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김노디는 이승만이 후원한 학생,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
이덕희(80·사진)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은 27일 “이승만과 김노디를 ‘부적절한 관계’로 소개한 ‘백년전쟁’은 완전히 허위”라고 했다. 한인 이민사 다큐멘터리 촬영차 이달 내한한 이 소장은 “이승만은 김노디가 여성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 후원자였고, 김노디도 그런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했다. 그는 “이승만은 수많은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해 추천서와 장학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김노디는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승만의 추천과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여럿이다. 해방 후 이화여대 교수와 적십자사 사무총장을 지낸 김신실도 이승만 추천으로 오벌린 대학을 졸업했다.
김노디 지사는 이승만이 설립, 운영한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교장을 지냈다. 이 소장은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서 김 지사의 연설을 눈여겨본 이승만이 그의 능력과 자질을 믿고 일을 맡겼을 것”이라고 했다. 하와이에서 여성이 교장을 맡은 것은 김노디가 최초였다고 한다.
이 소장은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여성 인권과 교육 향상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1906년 설립된 한인중앙학교는 남학생만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승만이 1913년 교장을 맡으면서 당시 한인 사회로서는 혁명적인 조치로 남녀 공학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이 소장은 미국 남가주대 도시계획학 석사를 마치고 하와이에서 30년간 환경계획가로 활동한 뒤 하와이 한인 이민사 연구에 몰두하여 ‘하와이 한인 여성 단체들의 활동’ 등 논문을 발표하고 이민 사료를 발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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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10.28 03:00
지난달 22일 하와이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김노디, 안정송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문대통령 왼쪽은 김노디 지사 딸인 위니프레드 리 남바씨/뉴시스
지난달 22일 하와이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김노디, 안정송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문대통령 왼쪽은 김노디 지사 딸인 위니프레드 리 남바씨/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하와이 방문 때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식을 거행했다. 대통령이 해외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직접 훈장을 준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건국훈장을 받은 두 명 중 ‘김노디’라는 이름이 있었다.
‘3⋅1 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대한부인구제회 임원으로 여성의 권리를 높이는 교육에도 힘쓰셨다.’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김노디(1898~1972) 지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이승만 情婦'처럼 다룬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을 '플레이보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시 20대였던 김노디 지사와 불륜관계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승만 뒷편에 서양 여성들과 함께 김노디 지사 얼굴이 보이게 편집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을 '플레이보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시 20대였던 김노디 지사와 불륜관계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승만 뒷편에 서양 여성들과 함께 김노디 지사 얼굴이 보이게 편집했다.
김노디 지사는 대선이 한창이던 2012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유튜브 동영상에 등장한 적 있다.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반역자’로 비난한 ‘백년전쟁’에서다. 300만 넘게 봤다는 이 영상에서 김노디는 ‘이승만과 놀아난 철부지 여성’처럼 나온다. ‘나이 마흔여섯에 자신을 숭배하는 스물두 살 여대생과 여행도 하고’라는 해설과 함께 ‘오벌린대 여대생 노디 김’ 자막과 얼굴 사진이 등장했다. 이 영상은 1920년 6월 두 사람이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하는 맨(Mann) 법 위반으로 체포⋅기소됐다’고 소개했다.
미국 경찰에 체포될 때 찍은 것 같은 사진(일명 ‘머그 샷’)도 여러 차례 내보냈다. ‘이승만은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며 잡지 ‘플레이보이’ 표지를 배경으로 김노디 여사 얼굴까지 등장시켰다. ‘백년전쟁’대로라면, 김노디는 ‘플레이보이’ 이승만의 정부(情婦)였다.
◇'옷깃을 적시게 할 만큼 비감한 연설’
김노디의 1919년 필라델피아 연설은 미주 교포신문인 ‘신한민보’가 ‘비감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눈물을 옷깃에 적시었다더라’ (1919년 5월 6일 자)고 보도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신한민보는 이후 김노디의 활약을 잇따라 전했다. 김노디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5월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국친우회’ 대회에서도 첫 연사로 나섰다. 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서재필·이승만이 주도해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구미에서 결성된 친한단체다. 한국 독립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는 걸 목표로 한 이 단체를 확산시키기 위해 김노디는 미국 순회 연설을 다녔다. 신한민보는 ‘김노디 여사의 애국적 활동’(1920년 6월 4일)기사에서 그해 5월 30일에도 오하이오주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연설이 예정돼 있다고 소개했다.
◇'백년전쟁’의 ‘맨법 위반’ 공격
'백년전쟁'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부적절한 관계'로 미국 경찰에 체포돼 '머그샷'을 찍은 것처럼 화면을 합성해 내보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부적절한 관계'로 미국 경찰에 체포돼 '머그샷'을 찍은 것처럼 화면을 합성해 내보냈다.
‘백년전쟁’이 문제 삼은 것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1920년 6월 16일 시카고~샌프란시스코 간 기차를 함께 탄 여행이다. 이승만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위해 하와이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승만은 도중에 클리블랜드, 새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 등에 들러 모임을 갖고 미국인과 한인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김노디는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석한 뒤 오하이오주 오벌린대로 돌아갔다가 하와이의 어머니를 만나러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덕희(80)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은 ‘백년전쟁’의 허구를 밝히기 위해 김노디 여사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가 2015년 낸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에 따르면, 김노디에겐 미행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6월 22일 시카고 이민국에 이승만과 김노디가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맨 법’을 어기고 있다고 신고했다. 호놀룰루 이민국 조사관은 그해 8월 27일 김노디를 면담 조사하고, 이승만과 김노디의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신빙성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김노디가 어머니를 만난 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 있는 도항증도 발급해줬다. 이승만과 김노디는 검찰에 기소된 적도 없다.
◇김노디와 이승만
김노디는 호놀룰루 이민국 조사에서 이승만에 대해 ‘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항상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늘 그분을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다’고 답했다. 1905년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한 김노디는 오하이오주 우스터 고교와 오벌린 대학에 진학할 때, ‘한인 중앙학교’ 교장이던 이승만의 도움을 받았다. 이승만은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소개장과 장학금을 받도록 편지를 보내 도와줬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에 돌아온 김노디는 1922년부터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에 힘썼고, 광복 후인 1953년 귀국해 외자구매처장(조달청 전신)으로 일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39년10월25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독립운동단체 고문단과 함께 촬영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모자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이승만연구원
이승만 대통령이 1939년10월25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독립운동단체 고문단과 함께 촬영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모자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이승만연구원
1939년11월 워싱턴 D.C를 향해 하와이를 떠나는 이승만 박사 부부. 왼쪽 모자 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김노디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력자였다. /이덕희씨 제공
1939년11월 워싱턴 D.C를 향해 하와이를 떠나는 이승만 박사 부부. 왼쪽 모자 쓴 이가 김노디 지사다. 김노디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력자였다. /이덕희씨 제공
◇‘민족문제연구소’의 침묵
이승만을 ‘반역자’ ‘플레이보이’로 매도한 동영상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달 김노디 지사 서훈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사과나 해명 하나 내놓지 않았다. 이 연구소를 이끄는 임헌영 소장은 2019년 ‘민중의 소리’ 인터뷰에서 현 정부의 대북(對北) 정책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근대사 이후의 흐름을 바꿨다”, “동학혁명도 3⋅1운동도, 4⋅19혁명도 못 바꾼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할 만큼 현 정부와 가까운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가 김노디 지사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면, 사과나 해명을 하든지, 아니면 반발이라도 해야 할 텐데, 침묵을 고수한다. 유튜브에선 지금도 ‘눈물이 난다’ ‘진실을 알려주는 다큐를 만들어줘 고맙다’는 댓글이 달려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년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2019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백년전쟁’은 주류적·역사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양한 여론의 장(場)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며 “방송 내용이 (객관적) 사료에 기초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백년전쟁’을 내보낸 ‘시민방송’을 중징계한 결정이 위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관 13명 중 7대6 차이였다. ‘백년전쟁’이 문제없다고 판단한 대법관 7명 중 6명은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됐다. 작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이 대법원과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정부가 김노디 지사를 뒤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백년전쟁’이 모욕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명예에 대해 아무런 해명이나 사과 없이 훈장 하나 챙겨주면 그만일까. 민족문제연구소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와 이메일로 문의했으나 연구소측은 “답변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서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백년전쟁’이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인격 살인에 가까운 공격을 한 데 대해 반성하고 영상을 내려야 한다”면서 “’백년전쟁’ 인터뷰에 응해 권위를 더해준 역사학계 인사들도 사과나 해명을 내놓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김노디는 이승만이 후원한 학생,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
이덕희(80·사진)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은 27일 “이승만과 김노디를 ‘부적절한 관계’로 소개한 ‘백년전쟁’은 완전히 허위”라고 했다. 한인 이민사 다큐멘터리 촬영차 이달 내한한 이 소장은 “이승만은 김노디가 여성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 후원자였고, 김노디도 그런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했다. 그는 “이승만은 수많은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해 추천서와 장학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김노디는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승만의 추천과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여럿이다. 해방 후 이화여대 교수와 적십자사 사무총장을 지낸 김신실도 이승만 추천으로 오벌린 대학을 졸업했다.
김노디 지사는 이승만이 설립, 운영한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교장을 지냈다. 이 소장은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서 김 지사의 연설을 눈여겨본 이승만이 그의 능력과 자질을 믿고 일을 맡겼을 것”이라고 했다. 하와이에서 여성이 교장을 맡은 것은 김노디가 최초였다고 한다.
이 소장은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여성 인권과 교육 향상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1906년 설립된 한인중앙학교는 남학생만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승만이 1913년 교장을 맡으면서 당시 한인 사회로서는 혁명적인 조치로 남녀 공학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이 소장은 미국 남가주대 도시계획학 석사를 마치고 하와이에서 30년간 환경계획가로 활동한 뒤 하와이 한인 이민사 연구에 몰두하여 ‘하와이 한인 여성 단체들의 활동’ 등 논문을 발표하고 이민 사료를 발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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