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15광복절 직후 사진 한 장을 카카오톡 메시지로 받았다. 누군가 연설하는 사진이었다. 연사의 하관이 광복회장 같기는 한데, 연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작은 글씨로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그 아래 큰 글씨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였다. 첫 느낌은 이랬다. ‘누군가 또 장난을 쳤구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이런 유의 유머들이 넘쳐난다. 다소 어려운 단어나
한자를 어린아이들 눈으로 풀이하는 식이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짓’을 뜻하는 4자성어는?
단답식 ‘( )( )( )가’의 괄호에 들어갈 정답은 ‘(고)(성)(방)가’겠지만 아이의 답변은
이렇다. ‘(아)(빠)(인)가’. 대한민국이란 한자 국호를 우리나라라는 쉬운 우리말로 바꾼 합성 사진인 줄만 알았다.
그게 합성이 아니라 진짜임을 알게 됐을 때 밀려온 허탈감…. 그 다음엔 ‘참 애쓴다’는 느낌과 함께 ‘그래도 일관성은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죽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싶었으면 이런 코미디 같은 짓을 벌였을까.
그 연단에서 마구 쏟아낸 요설(妖說)이나 그 이후 궤변에 대해선 논평하고 싶지 않다. 본란(本欄)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청와대는 광복회장 발언에 대해 18일
“광복회장으로서의 입장과 생각을 밝힌 것”이라며 “청와대와는 무관하고, 사전에
간섭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광복회장 기념사 내용을 사전에 몰랐을 리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몰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그 행사 때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태극기 문양 아래 ‘우리나라’라고 새긴 마스크를 썼다.
다른 때 같으면 참신한 디자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마스크였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선 광복회장의 연단과 함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소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대통령이 부주의했던 건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람의 기념사에 심정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인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헌법에 새겨진 우리의 국호(國號)다. 1948년 7월 제헌국회 때 국호로 정해졌으며 문재인 정권이 국가 정통성의 연원(淵源)으로 삼으려는 상하이 임시정부 때부터 사실상 국호였다. 현행 헌법전(憲法典)의 공식 제목도 그냥 ‘헌법’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이다.
그 헌법에 의해 당선되고 대통령 선서까지 한 문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언행을 보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서 임기의 3분의 2를 거의 다 채운 지금도 이 나라가 친일과 독재,
사이비 보수 세력이 주류인, 청산돼야 마땅한 체제로 보는가.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대통령의 부정적 인식은 음지에서 암약하던 대한민국 부정
세력이 양지에서 활개 칠 공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 세력은 이제 대놓고 애국가는 물론 국호까지 바꿨으면 한다. 그렇지 않아도 문 정권 들어 양심 도덕 상식 평등 공정 정의 법치 검찰개혁 같은 단어의 뜻을 전혀 다르게 쓰는 ‘문재인 어족’의 탄생으로 두 개의 언어가 충돌하는 아노미 상태다. 이제 국호까지 두 개로 만들 참인가.
당신들의 ‘우리나라’에선 박정희의 공화당 사무처에 공채시험을 봐서 합격하고,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에서 조직국장이란 요직을 지냈으며, ‘친일수구의 본산’이라고 매도한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광복회장의 전력은 ‘생계형이었다’는 한마디로 너무 쉽게 용서된다.
기업에 다니거나 장사를 한 것도 아니고 집권당 요직에 보수당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지내놓고 ‘생계형’이라니…, 진짜 ‘생계형’들은 가슴을 칠 얘기다. 변명도 앞뒤가 맞아야 하거늘.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그토록 관대한 정권이 ‘대한민국 백성’을 적폐 청산할 때는 어찌 그리 가혹한가.
우리나라(Our country)는 동서를 막론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찬 용어를 이렇게 오염시킨 것만으로도 큰 죄를 짓는 일이다. 국민통합의 언어를 분열의 언어로 쓰려는 책동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나라’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라.
▶박제균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