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입양 사기에 관한 법률 자문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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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미국에 산지 10 년 가까이 되가네요,
조기 유학으로 고등학교때 미국으로 왔지만,
모르는 것이 죄 라고,,
유학 올때부터 사기를 당했습니다.
18 살이 안되었었기에, 가디언이 필요 했고,
순하디 순하기만한 저희 어머니의 친한 친구라는 사람이 소개를 해서,
가디언을 구했습니다.
가디언은 그당시 나이스 하기만 했습니다.
어머니 친한 친구분의 소개 였기에 당연히 믿었습니다.
저희 가족들도 모두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일 친한 친구 였으니까요..
유학 오기 직전, 가디언 아줌마는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내 대장부라면 큰 물에서 놀아야 커지는 거라고..
좋게만 봤었습니다..
가디언 아줌마는 자기는 디자이너 이고, 자기 남편은 미국의 공무원 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거짓말은 없었습니다.. 약간의 사기가 있었을 뿐..
막상 모든것을 결정하고 고등학교 자퇴서를 내고,
미국으로 유학와서 보니..
남편은 공무원이 맞았습니다.
우체부.
아줌마는 디자이너로 보기엔 좀 부족 했습니다.
세탁소 일하는 아줌마. 본인 세탁소도 아님.
본인 세탁소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됨.
처음 왔을 때 에는, 미국 유학으로 오게 될 경우,
구지 사립 학교를 안가고, 공립 고등학교를 다녀도 되며,
자기가 연줄이 있어서 몇달에 한번씩 district office 에 가서,
비자 연기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몇달에 한번씩 아줌마에게 몇천달러씩 내며 그짓을 해왔습니다.
와서 보니 저같은 사람이 두명 더 있더군요.
그 아줌마의 실제 조카와, 그 조카분 아버님의 회사 상사의 딸.
처음 6 개월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나이스 하기만 했으니까요.
와서 보니 그 딸 이라는 여자 (저보다 누나)는 매일 그 아줌마 뒷다마를 까더군요.
악녀니 또1라1이니 정말 저주 스러운 말들을 하더군요.
그런 말들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여자애가 아직 철이 없구나 했죠..
한달에 $ 2500 의 거금을 내면서 살았습니다.
그 돈 안에는, 모든 생활비가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해주듯 저에게 해주는 조건 이였습니다.
용돈도 주고 옷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처음엔 김밥도 점심으로 싸주고 일주일에 $ 20 이라는 돈도 주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김밥 정말 토할때까지 오래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김밥이 정말 김하고 밥만 있더군요..
처음엔 옷도 사주었습니다.
알마니 익스첸지 같은데서 면티 몇장 사주더군요.
discounted shopping center 인건 정말 나중에 알았습니다.
처음엔 학교 오갈때 ride 도 잘 해주더군요.
제 관광 비자 6 개월 짜리가 만료 될 때 쯔음,
가디언은 이런 말을 저희 부모님께 했습니다.
돈을 좀 일시불로 줄 수 없느냐.
한국 부모님 입장에서 그런 부탁 들어주면 왠지 저에게 더 잘 해줄거 같았나 봅니다.
해줬습니다.
그돈으로 당시 신형인 BMW 528i 를 샀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 부탁을 했었다는건 모든일이 끝나고 저도 약 3 년 전에 겨우 알았습니다.
6 개월 쯤 지나고, 제 비자가 만료 됨과 동시에 슬슬 본색을 드러 내었습니다.
일단 저에대한 용돈이 줄어 들더군요.
일주일에 $ 20 씩 주던 용돈이 처음엔 $ 10 으로 나중엔 $ 5 로.. 나중엔 아예 안줬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명목으로 용돈을 줄였습니다. 그당시 가정 환경이 안좋은 친구들과 제가 어울린다는 말 이었습니다. 자기들은 가정환경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 지금 생각 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당시 제 친구들 가정환경이 뭐 최고급은 아니여도 한인 사회에서는 중간은 되는 사람들이고, 그 친구들 아직도 연락 하고 지냅니다. 산호세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식당의 아들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튼 수작으로 제 용돈을 줄이기 시작 했고, 나중에는 돈의 중요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며 자기들 차 세차를 시켰습니다.
차 세차를 하면 $ 5 정도 주었던게 기억이 나는군요.
시간이 좀더 지나자 제가 돈이 없다고 집에 말하고 어린나이에 학교앞 공중 전화에서 콜랙트 콜로 한국에 전화해서 처음 남기는 말 한마디에 영어못하는 엄마를 위해,, 통화하기 위해서,, "엄마 나 xx야 그냥 예스 라고 대답해 엄마.. " 이런식으로 힘들게 통화를 하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매일 돈이 없다고 칭얼 대자 다음에 오셨을때는 $ 500 정도 용돈을 주고 조금씩 아껴 쓰라고 다독이고 가셨었습니다. 그것을 그 가디언이 알았을 때는 돈이 이미 있으니 필요 없다는 식으로 저에게 용돈을 아예 안주었습니다.
사주던 옷도 안사주더군요..
운좋으면 한달에 한번 기분 좋고 지 딸 쇼핑하는날 면티 한장씩 사주던것도 점점 안사주고,, 저랑 같이 있던 형 옷만 물려 받게 되더군요.. 나중에는 옷이 없고 속옷이 없어서 한국에서 부모님이 옷을 사서 보내자, 그런 이유를 대면서 정말 양말 한켤래 안사주더군요..
밥도 제 때 안주고..
처음에는 아침엔 토스트, 점심엔 김밥, 저녘은 어떻게든 먹이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아침은 안먹었고,, 점심에 싸주는 김밥은 이 글을 읽는 분이 생각하는 김밥이 아닌, 정말 김안에 밥만 있고,, 뭐 가끔 단무지정도.. ? 저녘은 자기들 밥 먹을때 안먹고 낮잠을 잔다거나 하면,, 안깨우고 지들끼리만 먹고 안챙겨 주더군요.. 말은 자기들 좋을 대로들 하면서 말이죠...
주말에는 이상한 종교 단체에 같습니다..
어느 종교 단체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믿는 사람들이 있고 좋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치를 떠는 종교 단체 입니다. 교회라고 속이고 그 종교 단체에 주말에 가고 평일에도 가끔 갔습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기독교 학교를 다녀서 성경책을 많이 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책도 다르고 찬송가에 있는 노래들도 다른것이 많더군요.. 그런곳을 기독교로 속여서 2 년이 넘게 다녔습니다. 그 남편은 그 종교단체 샌프란 지역의 장로중 한사람 입니다.
그리고 약 1 년 반 후,, 이집에 있던 이집 조카네 아버지 회사 상사의 딸은,, 가출을 했습니다. 약 3 일뒤 경찰이 이 누나를 찾았을 때,, 경찰이 반 협박으로 말을 했습니다.
너 집에 갈래 아니면 감옥갈래 이렇게 말이죠.
누나는 집에 갈 바에야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그 누나,, 그정도로 안좋은 상황이였습니다.
그 누나는 결국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호주로 정식 유학코스를 밟고 갔지만,,
미국에서의 스트레스에 20 살이 채 안된 나이에 갑상선에 걸려 귀국 하고 병원 신세를 졌었습니다..
저도 차라리 그 때, 한국으로 돌아 갔어야 했지만,,
불체자로 있던 기간 때문에, 미국에 영영 못들어 온다는 가디언의 거짓 정보에..
또 낚여서,, 결정을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 까지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니베일 지역에서 홈스테드 하이스쿨을 다니며 후레쉬맨을 마치었습니다.
사포머로 올라갈 때 쯤, 이 가족은 So.S.F. 로 이사를 갔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말한 명목상의 이주는, 제 영어 실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Homestead HS 에는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당시 린부룩 다음으로 많았으며 선후배 포함해서 약 100 명 정도 있었습니다.) 이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은 사실 이지만, 이사한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집이 믿는 그 종교 단체가 샌프란에 위치 해 있고 그에 가깝기에, 그리고 둘째는 그 남편이 일하는 우체국이 샌프란 근처에 있었기 때문 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였지만, 이사를 가서도 저는 홈스테드로 10 학년을 다녔습니다.
저희 부모님께 말한 이유는, 제가 자격미달이라 전학이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미국을 모르기에 그냥 ㅇㅋ 했습니다.
사실은 저랑 같이 살던 형 (그집 조카) 가 12 학년 이기에 졸업반이고 전학을 잘못 갈 경우, required credit 을 다 받지 못해 제때 졸업이 힘든 것이였습니다. 이 이유는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저 때문에 아침 저녘으로 40 마일 거리를 운전 해야 한다고 차도 사야 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ㅈㄹ 을 해서.. 또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도요다에서 나온 시에나를 사더군요..
이사를 가서는 제가 물을 많이 마신다고 냉장고를 하두 많이 열었다 닫았다 해서 냉장고 문이 고장 났다고 냉장고도 사달라고 ㅈㄹ 해서 냉장고도 월풀에서 나오는 최고급 냉장고를 사줬었습니다.
...
지금와서 생각하니 또 울화가 치밀어 오르네요..
힘들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살다가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 더 힘든것 같지만..
저에게는 그 당시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약간의 비리를 알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미국이라는 땅에 친척 한명 없는데 어찌 해야 할바를 모르는 상황,, 아들이 미국에 볼모(?) 로 잡혀 있고 아들의 장래를 생각 하지만 모르니 어찌 할바를 몰라 쓴소리 한마디 못하는 부모님.. 한국에 나가서 쉬고 싶어도 나갈 수 조차 없는 상황..
모든 것이 너무 괴로워서 어린나이에 자1살도 여러번 생각 하고, 아무튼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습니다.
가디언과 싸우고 돈을 한달에 $ 2000 으로 줄였지만.. 나중에 또 싸우고 $ 1500 으로 줄였지만.. 그래도 힘들었습니다..
이 때 쯤에는 가디언은 라이드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버스로,, 방과후에는 버스나 걸어서 집에 왔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So.S.F. 지역은 언덕이 많습니다..
집도 약 중간 힐 쯤에 있는데 배고플때는 걸어내려가서 사먹고,, 약 30 분씩 걸어서 언덕을 올라왔습니다..
한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 끝에 힘들지만 양자입양이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사기는 끝나지 않았었습니다..
이 가디언들을 먼친척으로 하고 양자 입양을 하고, 유능한 변호사를 구하면,,
6 개월 이내에 SSN 이 나오고 임시 영주권을 통해 한국을 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신 유능한 변호사라 비싸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변호사님이지만, 당시 문xx 변호사님을 통해서 했습니다. 이 아줌마의 학교 선배라고 하더군요. 변호사님은 일을 잘 처리 해 주셨고, 빠른 기간안에 양자 입양 서류가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부모님은 제 호적을 팔때, 아들에 대한 모든 조건을 포기 한다는 각서를 쓸때 많은 양의 눈물을 흘리셨지만 그 영주권이 있으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아들의 꿈을 이룰 수도 있다고 해서 힘든 결정을 해주셨었습니다.
요즘 알아 보니 양자 입양 하는 서류 비용이 약 $ 3000 정도 한다고 하는 군요. 김xx 변호사님께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영주권 비용이 약 $ 2000 정도 한다고 하는군요.
괴로운 사실 입니다.
정확히 얼마를 이 아줌마한테 지불한지 지금 당장 기억은 안나지만 약 $ 20,000 정도 지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주권 신청 최종 사인에.. 남편이 사인을 안해주더군요.. 이유는 제가 나중에 사고를 치면 자기들도 엮이는데 왜 해주냐는 겁니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만 그럴 거면 애초에 말을 말고 돈을 받지를 말든지... 결국 또 노트북 최신형을 하나 사주면서 다독여서 사인을 하게 했습니다.. 그 깟 보잘것 없는 사인 한부분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입양 서류는 나왔지만, 임시 영주권은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 대학교 입학후 work permit 이 나오자 그게 임시 영주권 같은 거라고.. 그렇지만 이것으로 한국은 못 간다고..
고등학교 12 학년때 이미 독립을 한 저는,, 이 당시엔 이 사람들 하고 연락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더 나중에 알은 사실이지만,, 이 맘때쯤 저희 아버지는 스트레스로 여러번 쓰러지셔서 심장이 많이 약화되 있으셨고.. 어머니는 스트레스로 갑상선에 걸리셨습니다.. 이 스트레스들은 결국 암으로 이어졌고.. 저희 어머니는 작년 말까지 암치료를 받으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영주권이 나오고,,
처음 한국 나가던 21 살때..
아버지가 보여주시던 그동안 송금한 돈과 그 목적.. 그 사기 내용들을 알고 나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은 사실 이지만 예전에 어머니랑 친구였던 분은,, 자기 아들이 거기 가있음으로 한달에 약 $ 1000 정도 지불을 했고,, 자기 남편 상사의 딸을 소개 하고 저를 소개 함으로 자기네 가족은 돈을 적게 지불을 했던것 이였습니다..
전 그 때 이 세상 정말 믿을거 없구나..
미국와서 정말 한인 믿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만 절실 했고..
저같은 사람이 몇명 더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오늘이 제 생일 입니다..
벌써 24 살을 맞이하는 군요..
저는 이제 아픈 기억은 지우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기 당한 돈은 못 받더라도..
이런 사람들이 이 베이지역 한인 사회에서 있다는 것 자체가 경멸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찾아가서 흠씬 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정도로는 제 분이 풀리지 않을것 같네요..
법적인 절차를 통해 벌을 주고 싶습니다..
제 욕심일지 모르나..
저는 미국에 어느덧 10 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곧 있으면 미국 온지 만 9 년이 됩니다..
이제는 미국에 적응이 되고 americanized 되서..
미국이 더 편합니다..
여기서 일도 하고 싶고 앞으로도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주권을 잃지 않으면서,,
이 사기꾼들에게 법적으로 벌을 받게 할 수는 없을까요..
금전적으로 손해본 부분은 감수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전 제 생각에는 피해자 입니다..
더이상 저에게 피해가 오지 않고,,
이들에게 벌을 줄 수는 없을까요..
답변 부탁 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기 유학으로 고등학교때 미국으로 왔지만,
모르는 것이 죄 라고,,
유학 올때부터 사기를 당했습니다.
18 살이 안되었었기에, 가디언이 필요 했고,
순하디 순하기만한 저희 어머니의 친한 친구라는 사람이 소개를 해서,
가디언을 구했습니다.
가디언은 그당시 나이스 하기만 했습니다.
어머니 친한 친구분의 소개 였기에 당연히 믿었습니다.
저희 가족들도 모두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일 친한 친구 였으니까요..
유학 오기 직전, 가디언 아줌마는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내 대장부라면 큰 물에서 놀아야 커지는 거라고..
좋게만 봤었습니다..
가디언 아줌마는 자기는 디자이너 이고, 자기 남편은 미국의 공무원 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거짓말은 없었습니다.. 약간의 사기가 있었을 뿐..
막상 모든것을 결정하고 고등학교 자퇴서를 내고,
미국으로 유학와서 보니..
남편은 공무원이 맞았습니다.
우체부.
아줌마는 디자이너로 보기엔 좀 부족 했습니다.
세탁소 일하는 아줌마. 본인 세탁소도 아님.
본인 세탁소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됨.
처음 왔을 때 에는, 미국 유학으로 오게 될 경우,
구지 사립 학교를 안가고, 공립 고등학교를 다녀도 되며,
자기가 연줄이 있어서 몇달에 한번씩 district office 에 가서,
비자 연기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몇달에 한번씩 아줌마에게 몇천달러씩 내며 그짓을 해왔습니다.
와서 보니 저같은 사람이 두명 더 있더군요.
그 아줌마의 실제 조카와, 그 조카분 아버님의 회사 상사의 딸.
처음 6 개월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나이스 하기만 했으니까요.
와서 보니 그 딸 이라는 여자 (저보다 누나)는 매일 그 아줌마 뒷다마를 까더군요.
악녀니 또1라1이니 정말 저주 스러운 말들을 하더군요.
그런 말들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여자애가 아직 철이 없구나 했죠..
한달에 $ 2500 의 거금을 내면서 살았습니다.
그 돈 안에는, 모든 생활비가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해주듯 저에게 해주는 조건 이였습니다.
용돈도 주고 옷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처음엔 김밥도 점심으로 싸주고 일주일에 $ 20 이라는 돈도 주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김밥 정말 토할때까지 오래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김밥이 정말 김하고 밥만 있더군요..
처음엔 옷도 사주었습니다.
알마니 익스첸지 같은데서 면티 몇장 사주더군요.
discounted shopping center 인건 정말 나중에 알았습니다.
처음엔 학교 오갈때 ride 도 잘 해주더군요.
제 관광 비자 6 개월 짜리가 만료 될 때 쯔음,
가디언은 이런 말을 저희 부모님께 했습니다.
돈을 좀 일시불로 줄 수 없느냐.
한국 부모님 입장에서 그런 부탁 들어주면 왠지 저에게 더 잘 해줄거 같았나 봅니다.
해줬습니다.
그돈으로 당시 신형인 BMW 528i 를 샀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 부탁을 했었다는건 모든일이 끝나고 저도 약 3 년 전에 겨우 알았습니다.
6 개월 쯤 지나고, 제 비자가 만료 됨과 동시에 슬슬 본색을 드러 내었습니다.
일단 저에대한 용돈이 줄어 들더군요.
일주일에 $ 20 씩 주던 용돈이 처음엔 $ 10 으로 나중엔 $ 5 로.. 나중엔 아예 안줬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명목으로 용돈을 줄였습니다. 그당시 가정 환경이 안좋은 친구들과 제가 어울린다는 말 이었습니다. 자기들은 가정환경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 지금 생각 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당시 제 친구들 가정환경이 뭐 최고급은 아니여도 한인 사회에서는 중간은 되는 사람들이고, 그 친구들 아직도 연락 하고 지냅니다. 산호세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식당의 아들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튼 수작으로 제 용돈을 줄이기 시작 했고, 나중에는 돈의 중요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며 자기들 차 세차를 시켰습니다.
차 세차를 하면 $ 5 정도 주었던게 기억이 나는군요.
시간이 좀더 지나자 제가 돈이 없다고 집에 말하고 어린나이에 학교앞 공중 전화에서 콜랙트 콜로 한국에 전화해서 처음 남기는 말 한마디에 영어못하는 엄마를 위해,, 통화하기 위해서,, "엄마 나 xx야 그냥 예스 라고 대답해 엄마.. " 이런식으로 힘들게 통화를 하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매일 돈이 없다고 칭얼 대자 다음에 오셨을때는 $ 500 정도 용돈을 주고 조금씩 아껴 쓰라고 다독이고 가셨었습니다. 그것을 그 가디언이 알았을 때는 돈이 이미 있으니 필요 없다는 식으로 저에게 용돈을 아예 안주었습니다.
사주던 옷도 안사주더군요..
운좋으면 한달에 한번 기분 좋고 지 딸 쇼핑하는날 면티 한장씩 사주던것도 점점 안사주고,, 저랑 같이 있던 형 옷만 물려 받게 되더군요.. 나중에는 옷이 없고 속옷이 없어서 한국에서 부모님이 옷을 사서 보내자, 그런 이유를 대면서 정말 양말 한켤래 안사주더군요..
밥도 제 때 안주고..
처음에는 아침엔 토스트, 점심엔 김밥, 저녘은 어떻게든 먹이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아침은 안먹었고,, 점심에 싸주는 김밥은 이 글을 읽는 분이 생각하는 김밥이 아닌, 정말 김안에 밥만 있고,, 뭐 가끔 단무지정도.. ? 저녘은 자기들 밥 먹을때 안먹고 낮잠을 잔다거나 하면,, 안깨우고 지들끼리만 먹고 안챙겨 주더군요.. 말은 자기들 좋을 대로들 하면서 말이죠...
주말에는 이상한 종교 단체에 같습니다..
어느 종교 단체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믿는 사람들이 있고 좋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치를 떠는 종교 단체 입니다. 교회라고 속이고 그 종교 단체에 주말에 가고 평일에도 가끔 갔습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기독교 학교를 다녀서 성경책을 많이 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책도 다르고 찬송가에 있는 노래들도 다른것이 많더군요.. 그런곳을 기독교로 속여서 2 년이 넘게 다녔습니다. 그 남편은 그 종교단체 샌프란 지역의 장로중 한사람 입니다.
그리고 약 1 년 반 후,, 이집에 있던 이집 조카네 아버지 회사 상사의 딸은,, 가출을 했습니다. 약 3 일뒤 경찰이 이 누나를 찾았을 때,, 경찰이 반 협박으로 말을 했습니다.
너 집에 갈래 아니면 감옥갈래 이렇게 말이죠.
누나는 집에 갈 바에야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그 누나,, 그정도로 안좋은 상황이였습니다.
그 누나는 결국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호주로 정식 유학코스를 밟고 갔지만,,
미국에서의 스트레스에 20 살이 채 안된 나이에 갑상선에 걸려 귀국 하고 병원 신세를 졌었습니다..
저도 차라리 그 때, 한국으로 돌아 갔어야 했지만,,
불체자로 있던 기간 때문에, 미국에 영영 못들어 온다는 가디언의 거짓 정보에..
또 낚여서,, 결정을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 까지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니베일 지역에서 홈스테드 하이스쿨을 다니며 후레쉬맨을 마치었습니다.
사포머로 올라갈 때 쯤, 이 가족은 So.S.F. 로 이사를 갔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말한 명목상의 이주는, 제 영어 실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Homestead HS 에는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당시 린부룩 다음으로 많았으며 선후배 포함해서 약 100 명 정도 있었습니다.) 이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은 사실 이지만, 이사한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집이 믿는 그 종교 단체가 샌프란에 위치 해 있고 그에 가깝기에, 그리고 둘째는 그 남편이 일하는 우체국이 샌프란 근처에 있었기 때문 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였지만, 이사를 가서도 저는 홈스테드로 10 학년을 다녔습니다.
저희 부모님께 말한 이유는, 제가 자격미달이라 전학이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미국을 모르기에 그냥 ㅇㅋ 했습니다.
사실은 저랑 같이 살던 형 (그집 조카) 가 12 학년 이기에 졸업반이고 전학을 잘못 갈 경우, required credit 을 다 받지 못해 제때 졸업이 힘든 것이였습니다. 이 이유는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저 때문에 아침 저녘으로 40 마일 거리를 운전 해야 한다고 차도 사야 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ㅈㄹ 을 해서.. 또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도요다에서 나온 시에나를 사더군요..
이사를 가서는 제가 물을 많이 마신다고 냉장고를 하두 많이 열었다 닫았다 해서 냉장고 문이 고장 났다고 냉장고도 사달라고 ㅈㄹ 해서 냉장고도 월풀에서 나오는 최고급 냉장고를 사줬었습니다.
...
지금와서 생각하니 또 울화가 치밀어 오르네요..
힘들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살다가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 더 힘든것 같지만..
저에게는 그 당시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약간의 비리를 알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미국이라는 땅에 친척 한명 없는데 어찌 해야 할바를 모르는 상황,, 아들이 미국에 볼모(?) 로 잡혀 있고 아들의 장래를 생각 하지만 모르니 어찌 할바를 몰라 쓴소리 한마디 못하는 부모님.. 한국에 나가서 쉬고 싶어도 나갈 수 조차 없는 상황..
모든 것이 너무 괴로워서 어린나이에 자1살도 여러번 생각 하고, 아무튼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습니다.
가디언과 싸우고 돈을 한달에 $ 2000 으로 줄였지만.. 나중에 또 싸우고 $ 1500 으로 줄였지만.. 그래도 힘들었습니다..
이 때 쯤에는 가디언은 라이드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버스로,, 방과후에는 버스나 걸어서 집에 왔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So.S.F. 지역은 언덕이 많습니다..
집도 약 중간 힐 쯤에 있는데 배고플때는 걸어내려가서 사먹고,, 약 30 분씩 걸어서 언덕을 올라왔습니다..
한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 끝에 힘들지만 양자입양이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사기는 끝나지 않았었습니다..
이 가디언들을 먼친척으로 하고 양자 입양을 하고, 유능한 변호사를 구하면,,
6 개월 이내에 SSN 이 나오고 임시 영주권을 통해 한국을 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신 유능한 변호사라 비싸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변호사님이지만, 당시 문xx 변호사님을 통해서 했습니다. 이 아줌마의 학교 선배라고 하더군요. 변호사님은 일을 잘 처리 해 주셨고, 빠른 기간안에 양자 입양 서류가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부모님은 제 호적을 팔때, 아들에 대한 모든 조건을 포기 한다는 각서를 쓸때 많은 양의 눈물을 흘리셨지만 그 영주권이 있으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아들의 꿈을 이룰 수도 있다고 해서 힘든 결정을 해주셨었습니다.
요즘 알아 보니 양자 입양 하는 서류 비용이 약 $ 3000 정도 한다고 하는 군요. 김xx 변호사님께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영주권 비용이 약 $ 2000 정도 한다고 하는군요.
괴로운 사실 입니다.
정확히 얼마를 이 아줌마한테 지불한지 지금 당장 기억은 안나지만 약 $ 20,000 정도 지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주권 신청 최종 사인에.. 남편이 사인을 안해주더군요.. 이유는 제가 나중에 사고를 치면 자기들도 엮이는데 왜 해주냐는 겁니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만 그럴 거면 애초에 말을 말고 돈을 받지를 말든지... 결국 또 노트북 최신형을 하나 사주면서 다독여서 사인을 하게 했습니다.. 그 깟 보잘것 없는 사인 한부분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입양 서류는 나왔지만, 임시 영주권은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 대학교 입학후 work permit 이 나오자 그게 임시 영주권 같은 거라고.. 그렇지만 이것으로 한국은 못 간다고..
고등학교 12 학년때 이미 독립을 한 저는,, 이 당시엔 이 사람들 하고 연락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더 나중에 알은 사실이지만,, 이 맘때쯤 저희 아버지는 스트레스로 여러번 쓰러지셔서 심장이 많이 약화되 있으셨고.. 어머니는 스트레스로 갑상선에 걸리셨습니다.. 이 스트레스들은 결국 암으로 이어졌고.. 저희 어머니는 작년 말까지 암치료를 받으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영주권이 나오고,,
처음 한국 나가던 21 살때..
아버지가 보여주시던 그동안 송금한 돈과 그 목적.. 그 사기 내용들을 알고 나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은 사실 이지만 예전에 어머니랑 친구였던 분은,, 자기 아들이 거기 가있음으로 한달에 약 $ 1000 정도 지불을 했고,, 자기 남편 상사의 딸을 소개 하고 저를 소개 함으로 자기네 가족은 돈을 적게 지불을 했던것 이였습니다..
전 그 때 이 세상 정말 믿을거 없구나..
미국와서 정말 한인 믿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만 절실 했고..
저같은 사람이 몇명 더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오늘이 제 생일 입니다..
벌써 24 살을 맞이하는 군요..
저는 이제 아픈 기억은 지우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기 당한 돈은 못 받더라도..
이런 사람들이 이 베이지역 한인 사회에서 있다는 것 자체가 경멸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찾아가서 흠씬 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정도로는 제 분이 풀리지 않을것 같네요..
법적인 절차를 통해 벌을 주고 싶습니다..
제 욕심일지 모르나..
저는 미국에 어느덧 10 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곧 있으면 미국 온지 만 9 년이 됩니다..
이제는 미국에 적응이 되고 americanized 되서..
미국이 더 편합니다..
여기서 일도 하고 싶고 앞으로도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주권을 잃지 않으면서,,
이 사기꾼들에게 법적으로 벌을 받게 할 수는 없을까요..
금전적으로 손해본 부분은 감수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전 제 생각에는 피해자 입니다..
더이상 저에게 피해가 오지 않고,,
이들에게 벌을 줄 수는 없을까요..
답변 부탁 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성일2008-02-09 16:50